역사의 인물 '안의와 손홍록'
1439년, 조선시대 사고는 춘추관과 충주 2곳 뿐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성주와 전주 2곳에 사고를 더 만들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지세로 전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있던 전주 경기전에도 비상이 걸렸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전라감사 이광, 전주부윤 권수 등과 함께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 실록의 피난 대책을 논의했다. 처음엔 마루 밑을 파고 묻을까도 생각했는데 성주 사고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왕설래 끝에 실록을 숨길 피난처로 정읍 내장산이 낙점되었다.
전황은 급박해졌다. 6월 왜군이 금산까지 당도하자 전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어진과 실록 등을 책임지고 피난시킬 적임자가 필요했다. 이때 전북 정읍시 태인의 선비인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이 나섰다. 경기전에서 쓰인 각종 제기(祭器)와 <고려사>, 실록 등의 관리일지인 <형지안> 등까지 50여 바리를 옮겼다. 7월 초에는 태조의 어진을 정성스럽게 옮겼다. 가동 30여 명을 인솔하고 전주로 달려온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과 어진의 이안(移安)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두 선비는 선조가 별제(6품) 벼슬을 제수했지만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고사했다.
실록과 어진을 처음에는 내장산 용굴암에 보관했으나 습기가 많아서 은적암, 비래암 등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계속 옮겼다. 용굴암은 지금도 철제 계단을 타고 가파른 길을 올라야만 닿을 수 있는 험난한 장소이다. 두사람은 1592년 6월22일부터 1593년 7월9일까지 1년 18일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숙직을 했다. 겨울철엔 가파른 능선 아래 살을 에는 추위를 참으며 실록과 어진을 지켜냈다. 두 사람이 교대로 보초를 서는 동안 오희길과 유인, 구정려, 이도길, 좌랑 신흠 등이 찾아와 숙직을 도왔다. 또 무사 김홍무, 내장산 영은사 주지인 승려 희묵, 그리고 근처 마을에서 사당패 100여 명이 밤낮으로 암자를 떠나지 않고 지켜냈다.
4대 사고(史庫) 중 임진왜란 직전까지 남아있던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전주사고마저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소실되었다. 전주사고의 실록과 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태조 이성계부터(1392년) 명종 때까지(1567년)의 175년의 조선역사는 공백으로 남았을 것이다. 조선의 건국 상황은 물론 세종의 치세도 그저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의 역사마저도 사라졌을 것이다. 황윤석(1729~1791)은 ‘오희길전’을 쓰면서 실록 등 역사서적과 태조 어진의 피난과 이안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안의와 손홍록'은 물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참여한 민초들을 자세히 기록했다. 경향신문, 이기환기자 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