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상방

죽어도 여전히 ‘넥타이 맨 거지’

by 두승 2014. 8. 10.

 

  20131030일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했습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후 내내 전화 통화도 없었습니다. 10시가 넘어 휴대전화에 남편의 번호가 떴습니다. 술 취한 목소리로 그는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뭐가 미안하냐는 물음에도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남편은 별이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별이는 평소처럼 옹알이도 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됩니다. 만일 제가 별이를 꼬집어 울리기라도 했다면 남편은 생각을 고쳐먹었을까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이에 연필로 급하게 써서 옆방에 있던 친정오빠한테 줬습니다. “빨리 119에 전화해.” 저는 남편이 전화를 끊지 못하도록 계속 말을 시켰습니다. “우리 별이 너무 귀엽지. 밥 먹는데 너무 예뻤어.” 친정오빠가 119에 위치추적을 요청하는 동안 저는 남편에게 딴 생각하지 말란 마음을 담아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빠야.” 남편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119가 알려준 장소에 남편은 없었습니다. 1031일 저녁 7시쯤 모르는 번호가 전화기를 울렸습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물었습니다. “최종범씨와 어떤 관계십니까?” 저는 와이프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주검의 허벅지엔 깊은 상처가 선명했습니다. 언젠가 남편이 울먹이며 전화했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다 난간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몸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남편 허벅지 살이 S자로 찢겨 파였습니다. 남편은 사장이 찢어진 옷값을 줄 테니 수리를 끝내고 오라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늘 시커먼 기름때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퇴근했습니다. 여름엔 에어컨을 고치다가 동상을 입었고, 겨울엔 냉장고를 고치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남편과 동료들은 자신들을 넥타이 맨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은 정말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결혼식 다음날도 남편은 출근했습니다. 신혼여행은 겨울 비수기 때 가자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별이가 태어나던 날 진통이 심해 병원으로 옮겼을 때 남편은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양수가 터지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양수가 터지면 아기가 바로 나옵니까?” 시간이 걸린다는 간호사 말에 남편은 오전에 들어온 ’(수리 요청 접수)을 처리하러 갔습니다. 양수가 터졌을 때도 빨리 오라는 제 전화에 그는 말했습니다. “급한 콜만 마무리하고 갈게.” 별이는 펑펑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은 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는 별이에게 늘 효녀라고 했습니다. “비수기 때 태어나줘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원망할 수 없음을 그의 부재 뒤에야 깨닫습니다. 그는 일중독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정급 없는 노동자 아빠로서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발버둥이었습니다. ‘빨리 와서 세탁기 고치라는 고객의 전화로 새벽 5시부터 잠을 설치는 그는 24시간 편의점이었습니다. 고객 업무 평가에 생존이 달려있고 저질 고객을 만나면 갖은 수모를 참아가며 일을 하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직업이었습니다. 남편은 제게 월급명세서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신용카드 한 장만 줬습니다. 100만원 남짓하는 비수기 수입을 제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남편의 동료들도 그래왔다는 사실을 그가 죽은 뒤 다른 가족들과 이야기하면서 알았습니다. 남편은 삼성전자에 다니고 있지만 정식 직원이 아니고 협력업체 직원입니다.

(삼성전자 신종균 사장의 올해 상반기 6개월 보수는 1134500만원이다.)


  살았을 때 남편은 다짐했습니다. 어머니와 별이와 저 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를 남겨두고 떠난 남편이 야속했습니다. 이젠 남편을 믿습니다. 그는 분명 더 많은 사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SNS에 남긴 유언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를 잊지 못할 겁니다. 별이가 크면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게 아빠 마음이야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하던 고 최종범씨의 아내 이미희씨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