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해 등단한 최인호는 1973년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면서 최고의 대중 작가로 주목받았다. 젊은 여성 ‘오경아’의 삶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린 ‘별들의 고향’은 단행본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70년대 발표한 초기 소설은 산업화의 격랑에 휩쓸린 한국 사회의 변동과 개인의 문제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술꾼’과 ‘모범동화’, ‘타인의 방’, ‘가면무도회’, ‘다시 만날 때까지’, ‘깊고 푸른 밤’ 등을 발표하였다. ‘바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 ‘고래 사냥’ 등의 각본을 쓰면서 영화 작업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80년대에도 ‘불새’와 ‘위대한 유산’ 등을 펴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던 작가는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제2기 문학’을 시작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는 달리 황폐해지는 내면이 그를 종교로 이끌었다고 고백했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은 그는 ‘잃어버린 왕국’과 ‘저 혼자 깊어 가는 강’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동화집 ‘발명왕 도단이’를 펴내기도 하며 가톨릭 전문지 서울주보에 칼럼을 연재했다. 1997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상도’는 300여만부나 팔려 나갔다. 조선시대 상인의 삶을 통해 돈을 벌고 쓰는 일의 도(道)를 그린 ‘상도’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단 한순간도 시들지 않았던 푸른 창작열은 2008년 침샘 부근에서 암이 발견되면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나 생사를 초월한 의지로 펜을 내려놓지 않던 작가의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암을 통해 ‘제3기 문학’을 발아시켰다. 2011년 발표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 작품은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 하느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 ‘제2기 문학’에서 ‘제3기 문학’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하려 한다”면서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생(生)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
2013년 9월 선종한 작가 최인호의 책 「최인호의 인생」의 표지에 작게 박혀져 있는 이 글귀는 산다는 것의 숭고함, 생명의 당위성이 느껴진다. ‘암’에 걸린 자신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였지만 그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또 여느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겪을 수 있는 것을 다 겪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의식을 치렀다. 나는 이 할례의식을 ‘고통의 축제’라고 이름 지었다. 아직도 출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많은 분들에게 전하려고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인으로서 고통 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부활이라는 것 또 그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까지는 겪어내야 할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안다.
‘그동안 나는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다.’고 그간의 침잠을 짧게 설명하고는 자신에게 그런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은 다름 아닌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천사와 같은 머리 깎은 어린 환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저 아이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하며 절규하던 그가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 비로소 죄의식에서 해방되었다. “병원 안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 아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아빠, 엄마, 딸, 아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온갖 병으로 스러지고, 신음하고, 죽어가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죄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육화되어 오셨다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며 생명을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며 부활의 참의미라고 공언한다. 그는 암 투병을 통해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이 작품집을 통해 그가 걸어갔던 길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신앙고백이자 사랑의 고백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고백이다.
“제가 그토록 기도했으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였던 것은 제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고, 이를 구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의 기도는 엿가락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께 완전히 저를 맡기겠습니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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