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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

영화 '탄생' 관람 후기

by 두승 2022. 12. 14.

영화 '탄생' 은 김대건 신부가 15살에 유학길에 올라 26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종교 영화라기보다는 김대건 신부에 초점을 맞춘 역사 영화이다. 김대건 신부로 분한 윤시윤은 극에 완전히 녹아든 듯, 학구열이 빛나는 모습부터 박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언어와 지리학 등을 익힐 때는 눈빛이 반짝이고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할 때는 총명함이 엿보였다. 영화 '탄생'은 배우 안성기가 암 투병 중에도 이 작품을 찍었고, 윤경호와 이문식은 영화 속에서 웃음 담당으로 무게감 있는 장면에 한 스푼 위트를 담아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었다. 신앙 성조들이 너무나 험난한 길을 걷고 고생을 많이 해서 안타까웠고 지금처럼 태평한 시대의 행복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두 자매와 함께 쿠우쿠우에서 점심을 먹고 CGV 순천 신대점에서 영화 감상을 했는데 극장의 의자 간격이 넓어서 다리를 쭉 뻗을 수 있고, 발을 올려놓는 의자까지 있어서 편하고 기분좋게 영화감상을 했다.


 교구청 홈페이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자료를 토대로 생애를 요약해 보았다. 김대건은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김제준과 장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천주교회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지만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이 세례를 받은 것은 1836년이었다. 그는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던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부활절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김대건에 앞서 최양업과 최방제는 서울로 먼저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하면서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대건은 7월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명의 신학생은 1836년 12월 3일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극한의 날씨와  배고픔과 피곤을 극복하고 다음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했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인해 죽었다. 두 신학생은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함대의 세실 함장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대건은 조국의 동태를  살펴볼 생각으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배에 승선하여 행해 기술을 익히기도 했으나 프랑스 함대는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경비가 삼엄하여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김대건은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그곳도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해서 단념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나이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모진 풍랑을 견뎌내고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에서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심하여 제주도 용수리에 표착하여 고국땅에서 감격의 첫 미사를 올린 뒤 상해 출발 40여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입국 후 11월과 12월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 등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동생 난식과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주교님으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치밀한 준비끝에 중국 어부들이 드나들던 백령도에 배로 도착하여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갔다.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10일에는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김대건은 포도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고, 1846년 9월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이 관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남의 눈길을 피하느라 시신을 산길로만 밤에 운반하여 용인 미리내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