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7년 무렵, 가족은 서울, 강원도, 경기도 부평, 안양시 수리산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거듭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1836년 2월 6일 경기도에서 살고 있던 15살 최양업은 모방 신부로부터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뒤를 이어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그해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이 국경 넘어 변문까지 동행했다. 이후 마카오 파발꾼이 신학생들을 데리고 마카오까지 갔다. 1837년 6월 7일, 6개월이 넘는 고생 끝에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시련이 곧 닥쳐왔다. 마카오 민란으로 1839년 4월에서 11월까지 최양업은 교수 신부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근교 롤롬보이로 피신했다.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요동반도 태장하 해안 백가점을 거쳐 11월 소팔가자에 이른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4년 12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이후 김대건은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와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주교와 함께 조선 재입국에 성공했다. 반면,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무르면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통한 조선 입국 루트를 개척했다.
최 부제는 1847년 초 홍콩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로 보냈다. 이 문서에 기록된 기해년과 병오년 순교자 82위 중 79위가 시성되었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고,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사제 수품 후 그해 5월, 최양업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서해 뱃길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요동지방 양관과 차쿠에서 베르노 신부를 보좌해 중국 신자들을 사목했다. 이로써 최 신부는 한국인 첫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7개월가량으로 1849년 5월 말에서 12월 말까지다. 최 신부는 1849년 12월 압록강을 넘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185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의 성무를 시작했다. 최 신부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교우촌 순방에 들어갔다.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제가 무거운 짐을 다 짊어져야 했을 텐데 최 신부의 입국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잘 짐작하실 것” 이라고 썼다. 최 신부가 1년 중 순방해야 할 교우촌은 전체 교우촌의 약 70%에 해당하는 120여 곳으로 해마다 2,800여 ㎞를 걸어야 했다.
교우촌을 다니던 최 신부는 우리말 교리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서한에서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 있다.” 며 주요 교리와 기도문을 가사체로 노래한 천주가사를 편찬했다. 그는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12년간 해마다 7,000여 리를 걸어 교우촌을 순방한 그는 지쳤다. 1861년 6월 15일, 최 신부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님과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되뇌다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40살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지 11년 6개월 만이다. 최 신부의 유해는 선종지에 가매장됐다가 훗날 배론성지에 안장됐다.
1801년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성례는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가운데서도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봤으며, 이성례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어려운 이웃과 자신의 자식들을 알뜰히 보살피며 살았다. 부부는 자신들도 곧 체포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새벽에 수리산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맞았다. 최경환은 포졸들에게 교우들과 함께 질서정연하게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날 것을 권했다. 이성례는 포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렸고, 최경환은 포졸들이 식사를 마치자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 포졸 한 명 한 명에게 입혀줬다. 순교하면 필요 없게 되는 옷이었다. 그 사이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남녀노소 신자 40여 명은 행렬을 이뤄 한양을 향해 걸어갔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한 아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랐으며, 신자들이 달아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안 포졸들은 이들을 오랏줄로 묶지도 않았다고 한다. 끌려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들이 순순히 나선 것은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되었다. 잡혀온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이미 순교를 각오한 터였기 때문이다. 정작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막내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천주를 모른다." 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840년 1월 31일,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당고개로 끌려가 순교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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