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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

‘치즈 개척자’ 지정환 신부 선종

by 두승 2019. 4. 17.


  ‘임실 치즈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정환 신부가 향년 88세로 선종(善終)했다. 지 신부는 20대에 고국인 벨기에를 떠나 60년간 한국에서 참사랑을 보여준 별이었다. 고인이 전북에 남긴 많은 유무형의 업적과 발자취는 오랫동안 지역의 큰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의 임실 치즈가 전국적인 명성을 갖게 된 것은 온전히 지 신부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다. 1964년 부임지인 임실에서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산양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임실 치즈의 출발점이었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치즈공장이 임실에 세워져 오늘날 임실이 치즈산업의 메카로 우뚝 설 수 있는 모태가 되었다.



  지금도 변변한 공장이 없는 임실이 그나마 전국적으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이 치즈산업이다. 임실은 치즈로 연간 270억원의 소득 효과를 올리고 있다. 임실치즈축제에는 해마다 30~4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임실군은 2년 전 고인이 세운 치즈공장과 살던 집 등을 복원해 ‘임실치즈 역사문화공간’을 만들었다. 고인에 대한 임실 지역민들의 고마움과 존경심을 담아서다. 정부가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한 것도 치즈산업 발전에 대한 공을 인정한 탓이다.



  지 신부에 대한 지역민들의 존경심은 치즈산업을 일으킨 업적 때문만이 아니다. 고인은 평생 약자들과 함께 했다. 1980년대 ‘무지개의 집’을 세워 중증장애인의 재활을 도왔다. 2002년 호암재단으로부터 받은 사회봉사상 시상금 1억원과 임실치즈농협에서 매달 보내온 지원금, 지정환임실치즈피자 판매수익금 등 5억원으로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장애인 학생과 가족들을 지원해왔다. 본인 스스로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별세 전까지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한 ‘장애인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고인이 남긴 보이지 않는 유산도 값지다. 고인은 신부라는 직책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어려운 주민들의 삶으로 기꺼이 들어가 부대끼며 ‘함께 잘 사는 법’을 실천했던 성직자였다. 벽안의 신부로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고인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치즈를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장애인들을 자식처럼 돌보며 재활의지를 북돋아준 고인의 뜻을 어찌 헛되게 할 수 있겠는가.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지 신부의 고귀한 뜻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출처:전북일보 사설



  지정환 신부는 2019년 4월 13일 선종(善終)했으며 4월 16일 전주 중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르고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에 위치한 치명자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