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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생활

류항검 일가와 초남이 성지

by 두승 2020. 11. 6.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던 천진암이 있다. 류항검은 1784년 가을 무렵,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과의 접촉으로 천주교리에 눈을 뜬 류항검은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쳤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부락은 4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류씨 집성촌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일가가 살았던 곳이다. 류항검은 이 지역의 대부호였다.

 

 류항검은 호남지역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받아 초남이에서 그의 일가와 가족들에게 우선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나아가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전교하였는데, 그로 인해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까지 천주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와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도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 초남리에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중철 요한과 이순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서원을 하고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류항검이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이들 일가는 초남이에서 신앙생활에 충실하며,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피할 길은 없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류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류항검을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류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서 결국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류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류항검 아우구스티노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8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류항검의 가족은 연좌형에 따라 류중철과 류문석은 전주옥에서, 이순이, 류중성은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유항검의 어린 자녀들도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들이 살던 초남이의 집은 파가저택 형을 받아 웅덩이로 변했는데 이 지역 관할인 동산동 성당에서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지금의 초남이 성지가 조성되었다.

 

  초남이성지를 출발하여 원동초등학교-서부우회도로-전주천-숲정이-전동성당-치명자산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은 이분들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가는 길이다. 초남이에서 전주 시내에 들어와 만나는 숲정이는 류항검의 처 신희, 제수 육희, 이순이, 조카 류중성의 순교터이다. 일찍이 군사 훈련소였던 숲정이는 이들 일가의 처형을 시작으로 많은 신앙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 두 분이 최초로 순교한 곳이며, 류항검과 그 일행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치명자산은 류항검의 일가 일곱분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니, 이 길은 류항검 가족을 추모하는 길이다. 치명자산은 전주시 동남쪽에 위치한 한벽당 뒷산인데 예로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지만,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致命者山)으로 더 많이 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