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전망대에서 임진각까지 해안길 4,500Km를 두 번째 걷고 있는 73살의 도보여행가 황경화(안나)씨. 여고시절 그의 꿈은 작가였다. 그러나 박봉의 춘천역장인 아버지와 다섯 동생을 둔 그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 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교사가 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는 23살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하는 사업마다 망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빚을 갚느라 ‘절대빈곤자’ 로 살았다. 채권자들은 학교까지 찾아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해코지를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황씨는 57살 때 홀로 앉은 교실에서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저는 정체성이 없이 엄마 노릇, 선생 노릇, 아내 노릇…노릇, 노릇만 해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내 노릇 한 번 해보자.’ 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날로 집에 가서 남편한테 상의를 했더니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라는 말을 듣고 이튿날 바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정년을 7년 정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주변의 반대도 많았지만 그렇게 훌훌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한 일이 미뤄왔던 건강검진이었다. 재검사 항목이 많이 나왔다. 가까운 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반 동안 산을 오르내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년이 지나자 체력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우연히 TV에서 본 보리밭 황톳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65세 나이에 ‘도보여행가’ 로서 인생 2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비야 씨가 40일간 걸었던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국토 종단 길을 불과 23일 만에 해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겁도 덜컥 났지만 걷겠다는 욕망이 더 강했다. 67살 때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와 남해, 그리고 서해를 거쳐 임진각까지 이르는 길을 118일 동안 걸었다. 지리산, 한라산 등 웬만한 산은 다 올랐다. 이뿐이 아니다. 동티베트, 스페인 산티아고, 아이슬란드 등 48개국 오지를 도보로 여행했다.
황씨에게 길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길은 인생의 실마리다. 길이 길을 가르쳐 준다. 길은 꿈이요 도전이자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며 웃는다. 또 있다. 길로 인해 남편과의 새로운 연애에 빠졌다고 했다. '둘이 살지만 결국 누군가는 혼자 남게 됩니다. 그때에 대비해 홀로서기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저 때문에 홀로서기를 마스터했습니다. 또 제가 집을 떠나 보니 남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더라고요. 새삼 연애시절 생각도 나고, 남편이 해주는 계란찜도 너무 맛있고, 서로 감동하며 제2의 신혼처럼 지내게 됐습니다. 내년에는 둘이 배낭 메고 도보여행을 떠날 예정입니다.' 황씨는 평소에 ‘때문에’ 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오늘도 걷는다. 세계 최고령의 킬리만자로 등정 계획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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