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일요일, 아내와 집으로부터 탈출하려 궁리를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걸레질을 하던 아내가 나를 본다.
“여보, 점심 먹고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나, 점심 약속 있어”
“언제 들어올거야?”
“나가봐야 알지”
시무룩해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밤 10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왔다. 11시쯤 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어, 친구들이랑 술 한 잔...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혀 약 좀 사오라고 전화 했는데...”
“어, 배터리가 떨어졌어, 손 이리 내 봐.”
여러번 혼자 땄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답답해서...”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는 미련하냐가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가뿐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응급실 진료비가 아깝다며 이제 말짱해졌다고 애써 웃어보이며 검사 받으라는 내 권유를 물리치고 병원을 나왔다.
며칠 후 출근하는데 아내가 이번 추석 때 친정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노발대발 하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안된다고 했더니
“그 동안 나도 할 만큼 했잖아. 그럼 당신은 당신 집 가, 난 우리 집 갈테니까”
큰 소리 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가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세상 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결혼하고 처음,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
“여보, 만약 내가 지금 없어져도 당신과 애들은 사는데 아무 지장 없을거야.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 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3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 때 방긋 웃어주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 해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아내는 살가와 하지도 않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수없이 해 온 말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보, 집에 내려 가기 전에... 어디 코스모스 많이 펴 있는데 들렀다 갈까?”
“코스모스?”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보고 싶었나 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 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 보고, 꽃이 피어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 있는 곳으로 갔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것 말고 또 있어. 3년 부은거야, 통장은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고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그거 꼭 확인해보고...”
“당신, 정말 왜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 올해 적금 타면 울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 틀니를 하셔야 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내어 엉, 엉...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 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걸 좋아한다.
“여보, 전에 당신이 프로포즈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
“내가 뭐라 그랬는데?”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그랬나?”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어떤 때는 그런 소리가 듣고 싶기도 하더라.”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것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텐데... 안 일어나면 오늘 안 간다. 여보~! 여보~~!”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도 하지않을 것이다.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랑밭 새벽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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