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을 추모하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태석 신부님은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장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돈 보스코의 영성에 따라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하여 1991년 천주교 살레시오회에 가입하였습니다. 1992년 수도자가 되기 위해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여 여름방학 동안 케냐와 수단을 방문했을 때 참혹한 그곳의 현실을 보고 훗날 꼭 이곳에 와서 봉사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2001년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를 지망했고, 수도회는 그를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의 살레시오 수도 공동체로 파견하였습니다. 신부님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톤즈에는 살레시오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는 그곳 공동체의 일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금도 그곳에는 또 다른 살레시오 회원들이 조용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단은 내전으로 인해 상당히 치안이 불안한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안이 불안한 수단 남부의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봉사 활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톤즈에서 신부님은 말라리아와 콜레라, 나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지붕을 엮어서 병원을 보수했습니다. 신부님은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나병이 전염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끊임없이 보살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발가락이 문드러져 발모양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모양을 본떠서 발에 맞는 신발을 제작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순회하며 진료를 하였습니다. 그의 병원이 점차 알려지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 병원 건물을 확장하였습니다.
오염된 톤즈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가 매번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톤즈의 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난을 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하루 한 끼를 겨우 먹는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경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삶의 의욕을 잃은 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세워 원주민 계몽에 나섰습니다. 처음 초등교육으로 시작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하였습니다. 먼 곳에서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도 분필을 들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을 느끼도록 음악활동에도 관심을 쏟아 아이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그가 만든 35인조 브라스 밴드는 남부수단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 그들의 눈에서는 점차 살기가 가시고 그 자리에 평화가 스며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과 복잡한 난제를 극복하느라 지친 자신의 몸을 미처 돌보지 못했던 신부님은 2008년 11월 한국에 입국하였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어 증세가 점차 나빠져 결국 2010년 1월 14일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는 2010년 1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 수도회 관구관에서 1,500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습니다. 그의 유해는 전남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 천주교 공원묘지 살레시오회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