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信心)과 신행(信行)
이찬수 (강남대 교수)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종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때의 신심은 말 그대로 ‘믿는 마음’이다. 이때 믿음과 마음의 관계도 중요하다. 어법상으로 믿음은 마음의 수식어처럼 되어 있지만, 정말로 ‘믿는 마음’이라면 그때 믿음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정말 믿는 마음이라면 한쪽에서는 믿고 다른 쪽에서는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 전체가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과 마음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믿음이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믿음이다. 겉으로는 믿는다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신심이 아니다. 그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마음이 통일되어 있을 때 그때가 진짜 신심이다.
물론 믿음은 일종의 심리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믿음을 유지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믿음은 그에 어울리는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신행’(信行)이라는 말을 한다. 신행은 ‘믿음의 행위’ 또는 ‘믿음과 행위’라는 뜻이지만, 어떻든 ‘믿음’과 ‘행위’는 사실상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라면 행동도 그에 어울리게 나타난다. 그래서 믿음은 실천이기도 하다. 말로 하든 행동으로 하든 내적인 믿음은 외적 행위로 표현된다. 어느 순간 믿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즉 그 어떤 대상과의 온전한 관계가 유지되려면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신 혹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심화시키려면, 기도나 명상 등 끝없는 수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믿음과 마음이 그렇듯이, 믿음과 행위 역시 동전의 양면과 같다. 믿음 없는 행위는 가식이고, 행위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언제나 ‘행위로 표현되는 믿음’이어야 한다. 행위 역시 믿음이라는 내면 상태에 어울릴 때 진실성이 인정된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행위가 함께 오기 마련이고, 누가 봐도 멋진 행위 속에는 자신이 실천하는 일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믿음은 실천으로 나타나며, 그 실천은 믿음의 대상 또는 내용과 어울리는 삶이다. 너를 믿는다면 너에 어울리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 신을 믿는다면 신의 섭리에 부응하는 삶이어야 한다. 진리를 믿는다면 그 진리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아 낼 때에야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너를 믿는다면서 행동은 너를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너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믿음과 실천이 모순되면 그것은 믿음도 실천도 아니다. 예수가 가르쳤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내적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계명’인 것이다.(마태 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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