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은 원래 콩이 자라서 갖추게 되는 모양에 비해 기형으로 생겼다. 그것은 콩으로서의 특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습이다. 그뿐 아니라 콩나물은 식물의 테두리를 벗어나 동물의 초기 형태와도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니까 콩나물은 모든 생물체의 초기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만큼 가장 덜되고 개발이 안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생물이다.
그런데 콩나물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콩나물을 기르는 방식을 지켜보아야 한다. 우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 다음 빛을 차단하고 무엇보다도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요컨대 일체의 자극을 최대로 차단하고 콩나물 자체 내부로부터 오는 자극까지도 발휘할 기회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목마를 겨를이 없이 물을 계속 흠뻑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실뿌리가 나오지 않고 줄기 끝이 그냥 뿌리 역할까지 겸하는 기현상을 유지할 수가 있다. 결국 콩은 그 자체 안에 있는 생명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하고 차츰 그 능력까지 잃어 유약한 모습으로 기형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명체를 일체의 스트레스 요인이 제거된 인공적인 공간에 두고 과잉보호를 해서 기른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콩나물인 것이다.
국가 부흥기에 자녀를 길렀던 대다수의 기성세대들은 가난과 대가족 제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녀 하나하나에게 적절한 신경을 써주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여 가난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어릴적 부모가 자신에게 서운하게 했던 일을 기억하며 자녀들을 통제하기를 거부하고 무분별한 자유를 누리게 하려고 하거나 개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에 빠져서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교육하는 일이라기보다 콩나물을 기르는 일이다. 그래서 콩나물처럼 유약하고 기형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나약한 인간을 기르는 꼴이다.
안산 인질극, 서초동 3모녀 살인 사건등 끔직한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참을성이 부족한 옹고집 콩나물 인간들이 저지른 일임을 알 수 있다. 인권 존중도 좋지만 인내력과 배려심을 기르는 인성 교육도 이제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될 것 같다.
<이병호, 신앙인의 사색,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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