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쟁 교육
한 초등학생이 “나는 이틀간 27시간 30분 공부를 했다. 왜 내가 어른들보다 더 쉬지 못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는 글을 남기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더 두려운 것은, 매년 이 정도로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습노동에 시달린 아이들 중, 몇 퍼센트가 소위 명문대학에서 승리의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또 그 아이들은 직장과 사회에서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
몇 년 전 조사에서 서울대 신입생 중 부모 소득이 상위 20퍼센트 이내인 학생이 63퍼센트이고, 소득 하위 20퍼센트에 속하는 신입생은 8퍼센트에 불과했다. 특히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수시합격자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 통계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부모 재산과 학생 성적의 상관성은 여러 자료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경쟁 교육의 한 진실이다.
2. 가난의 대물림
가난한 많은 학생들이 편의점과 식당에서 생존을 위해 청춘을 소모할 동안, 또 다른 학생들은 부모의 자본을 소비하며 경쟁에 앞서 간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값싼 노동력을 무제한 제공하고, 그 값싼 노동력으로 또 누군가는 부를 늘린다. 우리 사회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만 언제나 가난할 뿐이다.
그렇게 가난은 시스템이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라.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워킹 푸어(working poor)와, 대물림 가난이 즐비하다. 저임금으로 해고로 내몰리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교사인 나는 해마다 가난한 학생들의 패배를 지켜보며, 노동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자들이 가난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3. 공정한 사회
어떤 사회가 공정한 사회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운전자가 속도위반을 하면 모두 6만 원의 범칙금을 내야한다. 작은 트럭에 배추 싣고 다니는 운전자도 재벌회장도 ‘똑같이’ 6만 원이다. 그런데 속도위반 범칙금으로 핀란드의 노키아 부사장이 1억 8000만 원을, 스위스의 한 재벌은 3억 3000만 원을 납부했단다. 재산에 비례해 ‘불평등하게’ 부과해야, 돈 많은 그들도 법규를 ‘똑같이’ 지키기 때문이다. 즉 '불평등으로써의 평등'이 공정한 것이다. 같아짐이 아니라,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의이다. 이것이 경쟁과 자유보다 앞서는 국가의 역할이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비용을 거의 100퍼센트 국가가 지원하는 것은, 그들이 돈이 남아 그랬을까? 그들이 1948년 전후 국민소득 8,000달러 정도일 때 실시한 대학 무상교육을, 왜 우리는 2만 달러가 넘어도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 또 그들 대부분은 대학 평준화에 가까운 정책으로 학생들의 입시부담을 줄여주면서도, 어떻게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선진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어린 학생들을 학습 노동으로 내몰지 않고, 부모가 가난하다고 학생이 삶을 포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부자에게 더 무거운 책무를 부과하고,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선진국일수록 몇몇의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 총량을 위해, 공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를 좀 못해도, 좀 부족하고 한때 실패해도 벼랑으로 내몰리지 않는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황주환 : 경북 작은 읍의 국어교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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