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활절은 예년에 비해 상당히 이른 편입니다. 우리는 춘분이 지나고 보름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냅니다. 춘분과 보름, 모두 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춘분, 낮과 밤 길이가 같습니다. 춘분을 지나며, 낮이 밤보다 길어지고, 빛이 어둠보다 많아집니다. 보름, 달이 가장 밝을 때입니다. 빛, 부활의 상징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부활절은 요즘과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어느새 봄, 해가 길어졌고 빛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 눈을 돌리면, 그런 생각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현실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 한밤중입니다. 그만큼 절망의 골도 깊고 넓습니다. 끔찍한 학대로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가는 어린 생명들, 생계형 알바가 70퍼센트에 이르는 찌들대로 찌든 젊은이들의 삶, 우울한 노년, 밀실 야합으로 ‘퉁’쳐 버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내용 테러방지법 등 요약하면 ‘헬조선’입니다.
봄은 왔지만, ‘봄’이 없습니다. 생기는커녕, 무기력만 가득합니다. 바로 이런 때, 우리는 부활절을 지내고, 축하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부활이 무엇인지, 어떤 상태인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부활과 관계가 없게 됩니다. 부활은 그런 사건입니다. 그런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아마도 희망을 뜻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세상의 끝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허나, 죽음과 절망의 기운이 이토록 짙게 드리운 현실에서 그런 희망이 가능할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현실 도피용 마약에 불과한 건 아닐까? 올해, 부활을 말하기란 몹시도 곤혹스럽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허나, 우리는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 억눌린 이들에게 깊은 관심과 연민을 보였습니다. 하늘의 참새와 들의 꽃도 지극 정성으로 돌보시는 하느님! 예수는 그들도 이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죄인으로 내모는 온갖 제도와 규정, 이를 비호하는 당시의 종교, 정치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예수가 가는 길, 박해의 그늘이 점점 짙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예수는 그 길을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갔습니다. 상황은 절망으로, 마음은 공포로 가득했지만, 사랑이 예수를 그 길에서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예수를 일으켜 세웠던 것, 공포 속에서 예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 예수가 사람들에게 쏟았던 사랑의 귀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활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사랑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 소중한 피조물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타자를 향한 열린 마음이 제대로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묻혔던 곳, 예수가 걷던 길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하면, ‘또 다른 우리’가 찾아와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승산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끄는 곳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일어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 바로 사랑의 귀결입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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