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문정현 신부는 사제 서품 50주년을 맞았다. 천주교 전주교구 중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금경축 미사에서 문 신부는 지난 50년을 함께 견디고 살아 준 교구 신자들과 도움을 준 분들께 고맙다고 인사했다.
1966년 전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이래 그의 삶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서 있었다. 감옥에 갇히고, 몽둥이로 얻어맞고, 차에서 떨어지는 등 갖은 고통을 겪으며 그의 육신은 쇠락해 갔지만, 방향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고난한 삶을 걷기 시작한 것은 유신의 칼날이 '민주주의'의 목을 깊숙이 찔러 숨조차 마음껏 내쉬기 어려울 때다. 갖은 고문과 조작 속에서 재판이 끝나고 하루만에 8명의 목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혁당 사건(1975년)이 일어났을 때 독재의 검은 손아귀는 이들의 시신마저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 때 온몸으로 이들의 시신을 지키고자 나섰던 이가 바로 문정현 신부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사제입니다. 우리 사제들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야 되고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했다. 그 뒤부터 그는 강정, 용산, 밀양, 쌍용차, 매향리 폭격장, 진도 세월호 참사 현장 등 아우성 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항상 모습을 드러내며 수도자,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곤 했다.
소값 파동과 농가부채로 농촌경제가 날로 피폐해 가던 1986년, 그는 한 농가에서 감나무에 줄로 묶인 장애아를 발견했다. 아이의 부모는 들에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아이 주변엔 개밥처럼 밥그릇이 나뒹굴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 일 이후 그는 교회 옆 창고를 개조해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여러 정성을 모아 '작은 자매의 집'을 열었다. 그는 투쟁의 선봉에 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게 부드러움과 자상함을 겸비한 신부였다.
2011년 초 250여 일간 지친 육신을 돌보느라 명동성당에서 서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쉬면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기도였다. 교회 안에서 살고, 기도하고, 길을 나섰다가도 교회로 돌아오는 문 신부도, 교회를 생각하면 뼈아픈 부분이 많다고 했다. 제도교회는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금의 제도교회는 예수시대의 유대교와 같다”고 했다. 교구와 본당이라는 구역, 지역으로 갇혀 있는 구조에서는 세상 속에서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이를테면, 교회가 시대를 읽고 반영하는 데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정현진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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