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도이칠란트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공부를 마치고 2년 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18세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연구하고 20세에 학위를 받았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교외에서 산보하며 며칠전,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함에 젖어 있을 무렵,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졸지에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너무나 황급한 루터는 순간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 성녀인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자기 목숨을 구해 주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로부터 약 2주 동안 준비를 마친 루터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수련을 쌓고 마침내 1507년에는 청빈, 정결, 순명의 3대 서원을 하느님의 대전에 바치고 수도자가 되었다.
도이칠란트 국내의 대사령 선포를 맡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루터와 견해가 다른 성 도미니코회의 테첼을 자기 구역 동부 지방 대사령 반포 선전 위원으로 임명하자 루터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테첼이 비텐부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이에 반항하여 95개조로 된 문서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였다. 이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방법으로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에 테첼은 106조의 반박문을 성당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였다.
루터는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에 테첼 측의 신학자들도 궐기하여 드디어 일대 논전이 벌어졌다. 1518년 4월 하이텔베르크 수도원의 공개 토론회에서 루터는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 의지란 없다고 주장하였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황에게까지 반역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심으로 복종한다고 언명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루터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다음에는 또 도이칠란트인 밀티츨을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엑수르제>라는 교서를 내려,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설명한 뒤 60일 안으로 반성하기를 루터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같은 해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에 마침내 파문당하였다. 이때부터 루터는 교황을 공공연히 배척하고 성체 성사 외의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 자기의 3대 원리를 역설하여 나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가 없다.
2.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고,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 등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3. 신앙의 규범은 성서뿐이다.
1525년 6월 13일에는 하느님께 한 공식 서원을 깨뜨리고 당돌하게도 수사의 몸으로 수녀원을 탈출한 16세 연하의 젊은 여자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보고 "비극 같은 개혁 운동은 희극(결혼)으로 끝나 버렸다." 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나갔으며 분열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루터가 신앙의 규범은 성서뿐이라는 주장을 한 뒤로 개신교는 성경을 독단적으로 해석하여 수많은 분파로 나뉘어 있고, 오로지 자신들의 교세 확장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개신교 교파는 세계 2만여 개의 분파가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약 200~250개 이상의 교파가 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그 여파가 교황청의 문턱을 넘어들자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바 없지 않았고, 특히 북유럽 일대의 주교좌에는 악폐가 거듭 쌓이기에 이르렀다. 주교 선정에 있어서도 직접, 간접으로 세속인들의 입김 때문에 부적임자도 많이 섞이게 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쇠약과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그들은 교회까지 자기들의 세력권 내에 넣으려는 음흉한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백성들도 무거운 세금에 눌려 허덕이던 세상이었다. 교황청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데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헌금 증서인 사면부 판매를 허용하자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태에서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십자가의 길, 로사리오 기도와 같은 근행(勤行)도 널리 보급되어 신앙생활이 엄숙하고 경건한 면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16세기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 요한 데 데오, 성 베드로 카니시오, 성 필립보 네리,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성녀 데레사,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등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성인들이 많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형세가 급박한 이 때, 성직자 중에는 탈선적인 언동으로 대중의 반감을 산 자도 있었다. 바로 이것을 노린 루터는 드디어 횃불을 들고 일어났다. 루터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만큼 신자층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 힘든 선행은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상공인들,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는 제후들, 독일인들의 그리스도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프로테스탄트 사학자 찰스 리어는 ‘루터의 반역 동기는 원인(遠因)이든 근인(近因)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신학자는 ‘도이칠란트 제후들이 정치적,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호감을 느끼지 못했거나 청빈을 강조하던 시절에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 교리에 귀가 솔깃해진 상공인들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가들은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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