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의 뿌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순실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와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다. 이 커넥션을 가장 잘 아는 이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은 최태민과 박근혜의 부적절한 관계도 10·26 사건을 일으킨 한 원인이라고 꼽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부장은 그 자세한 내용을 변호인단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인권변호사로 김재규 부장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80)를 만났다.
김재규 부장 입에서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가 어떻게 나왔는가?
사형당하기 4개월 전인 1980년 1월28일 김재규 부장을 면회 갔더니 최태민 얘기를 꺼냈다. 박정희 대통령을 쏜 이유로 구국여성봉사단의 망국적 전횡도 작용했다고 했다.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는 최태민이고 명예총재가 박근혜였는데 중정에서 조사해보니 최태민이 이 단체에 운영위원 30명을 두고 기업을 갈취하고 여성 정치 지망생 6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내용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정보를 취합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태민과 구국여성봉사단을 정리하고 영애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박근혜 말만 듣고 보고를 묵살했다고 한다.
김재규 부장 변론을 맡은 계기는?
김 부장이 나를 지명하기도 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변호인을 맡았다. 10·26 당시 김재규 부장에게 희생된 이들은 박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과 경호실 직원 4명이었다. 생명의 가치는 다 소중하지만, 박정희 때문에 죽은 어마어마한 숫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작은 희생으로 큰 혁명적 대의를 가져온 일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유신 독재로 민주주의가 신음하고 수많은 학생·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김 추기경은 김재규 부장의 10·26 거사가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인권변호사들에게 특별히 김재규 부장 변론을 당부하기도 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나를 불러 격려해주었다. 나중에 김재규 부장과 부하들 가족이 구명 탄원을 위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도 보듬고 위로해줬다.
김재규 부장의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민주주의 회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자기만 죽이면 되지 왜 부하들을 사형시키느냐고 호소했으나 신군부는 전원 사형을 집행했다. 김재규 부장은 다섯 명 부하들과 한자리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이마저 신군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부하들의 유해는 보안사에 의해 동두천·파주·벽제 등에 흩어졌다. 이후 사형당한 가족들끼리는 서로 왕래하면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명예가 회복될 한 가닥 희망 속에 지내고 있다. 김재규 부장의 부인은 다섯 부하들 자녀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김재규 부장은 생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래서 사형당하기 전, 부인에게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면서 감명을 받아 개종한 뒤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김재규 부장 재조명의 필요성은?
김재규의 10·26 정신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지 않고는 유신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즉 대의를 위해서 소의를 희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역적으로 몰린 조선시대 사육신도 재평가 받고 인정받는 데 250년이 걸렸다. 언제라도 10·26 거사 정신이 제대로 밝혀지고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다.
정희상 기자,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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