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 여행

강진 사의재, 영랑생가, 금곡사

by 두승 2018. 11. 18.

0 탐방일시:2018년 11월 17일

0 사의재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11월 23일 강진에 귀양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다산은 이곳 주막 뒷방에서 4년을 살았다. 사의재는 옛 모습 그대로 아담하고 소박하게 잘 꾸며져 있다. 돌담길과 초가집에서 옛 정취가 풍겨온다. 



사의재(四宜齋)는 생각과 용모, 언어, 동작 등 4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 하고, 용모는 엄숙하게 하며, 말은 과묵하게 하고, 동작은 반드시 더디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곳에서 <경세유표> <애절양>등의 저서를 남겼다.









1903년 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기독청년 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하나, 1923년 동경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생가로 돌아온 영랑은 민족 수난의 한과 비애를 달래기 위해 대나무숲에 싸인 생가의 사랑에서 손수 북을 치면서 시를 읊었다.


영랑 김윤식의 서정시가 영롱한 광채를 발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이 동인이 되어 내놓은 <시문학>이다. 그리고 1935년 박용철의 힘으로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이 발간된다. 그의 유명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영랑생가에서 모란공원 가는 길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공원 위쪽 정자옆의 이 표지 방향에 보은산 등산로가 있다.





금곡사는 보은산 우두봉 자락 석문 안에 숨어있는 고찰이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거대한 절벽이 있다. 그 계곡을 들어서면 금곡사 절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봄이면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대웅전 앞마당의 백제 계통 고려 양식인 삼층석탑(보물 829호)에서 1985년 복원작업 중 석가세존 진신사리 32과가 발견되었다. 삼층석탑은 기단에서 3층 탑신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규모를 줄여 안정된 비례를 보이고 각 부분에 짜임새가 있다.



금곡사 계곡 입구에 방랑시인 김삿갓이 남긴 시 한 수가 있다. 그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시라고 한다.
雙岩竝起疑紛爭(두 바위가 나란히 솟아 다투는가 여겼는데)
一水中流解忿心(한 줄기 물 가운데로 흘러 성낸 마음 풀어주네.)
현실과 외부세계를 격리시키는 쌍바위는 이 세상의 분노이다. 하지만 그 틈을 헤집고 흐르는 작은 개울물이 그 못난 중생들의 분노를 구도의 길로 이끌어 가는 혜안인 것이다.


'국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우이령길 트레킹  (0) 2018.12.12
목포에서 두 달 살기  (0) 2018.12.03
강진 고바우전망대, 가우도 트레킹  (0) 2018.11.16
화순 고인돌 유적  (0) 2018.11.12
화순 천불천탑 운주사  (0) 201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