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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진주성 촉석루

by 두승 2020. 6. 24.

0 여행일시:2020년 6월 22일
0 진주 가좌산, 망진산 트레킹을 끝내고 천정배수장에서 남강 천수교 방향으로 내려왔다. 남가람공원을 지나 진주교를 건넌 뒤 입장료 2000원을 지불하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3대첩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크게 무찌른 3대 싸움을 말하는데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을 말한다. 진주성에서의 1차 혈전은 1592년 10월, 2만의 왜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김시민 장군은 군사 3,800여 명으로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다.

2차 혈전은 1593년 6월, 1차전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7만 대군으로 공격하여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때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충절을 다한 곳으로 유명하다.

진주성과 마주한 남가람공원은 산책로와 전망대, 휴게소 등의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진주성 촉석루

진주교에서 바라본 남강과 진주성

 

진주성(사적 제118호)은 고려 말에 왜구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성이며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장군 전공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 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진주성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2층 높이의 촉석루이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장수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던진 '의암'은 촉석루 아래쪽에 있다. 

저곳으로 내려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관리인이 못들어가게 한다.

의기사(義妓祠)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출생으로 1574년 주달문(朱達文)의 딸로 태어났다. 訓長을 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모녀는 침방관비로 들어갔다. 1592년 최경회의 부실이 되었는데 최경회가 전라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훈련을 뒷바라지 했으며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의암'으로 내려가 끌어안고 남강에 떨어져 죽었다.

진주 남강에서는 매년 10월 첫째 주에 유등축제가 열린다. 기원은 임진왜란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남강에 등불을 띄워 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고 성 밖 지원군과의 군사 신호로 풍등을 올리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도 하는 통신수단으로 두루 사용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망진산

자귀나무 꽃은 초여름 숲속에서 짧은 분홍실을 부챗살처럼 펼쳐놓고 가느다란 수술이 긴 털처럼 모여 있다. 잎은 50여 개가 모여 잎 대궁 전체 길이가 한 뼘 반이나 된다. 개개의 작은 잎은 두 줄로 서로 마주보며, 잎마다 상대편 잎이 꼭 있어서 혼자 남는 홀아비 잎이 없다. 밤이 되면 이 잎들은 서로 겹쳐진다.

자귀나무는 낮에 펼쳐졌던 잎이 해가 지면 서로 마주 보며 접히는데, 이것은 남녀가 사이좋게 안고 잠자는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옛사람들은 부부 금슬이 좋음을 상징한다 하여 '음양합일목', '합혼수' 라고도 불렀다. 이런 연유로 예전에는 자귀나무를 울타리 안에 정원수로 많이 심었다.

김시민 장군 동산

김시민 장군 공적비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순천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1시간 정도 남아서 중앙시장의 맛집으로 소문난 중앙국수를 찾아갔다. 이 집의 비빔국수는 국물이 있는데 맛이 좋아서 국수가 술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