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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보성 서재필 기념공원

by 두승 2021. 11. 9.

0 탐방일시:2021년 11월 5일
0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생가 근처에 위치한 서재필 기념공원은 4만6천㎡ 규모에 기념관과 독립문, 사당, 동상, 조각공원 등이 들어서 있으며 기념관에는 서재필 박사의 유물 7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서재필 선생은 한말과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로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재 서재필 선생 동상

서대문의 독립문과 크기와 모양이 같은 독립문 모형

기념관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서광효의 아들로 보성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재종숙 서광하에게 입양됐다. 7살 때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김성근 집에서 한학을 배운 뒤 1882년 과거에 최연소로 급제했다. 그 무렵 외삼촌 집에 드나들던 서광범을 비롯해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임오군란으로 신식 군대의 필요성을 느낀 김옥균은 서재필에게 일본 도야마육군학교에 유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1년간 수학한 뒤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주청했다. 그해 12월 급진 개화파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재필은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조선인 생도와 조선에서 그가 조련한 사관들을 이끌고 행동대장으로 참여했다.

불과 20살의 나이에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청나라가 개입해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주역들은 역적이 됐다. 서재필은 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망명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생부와 아내는 자살하고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생모는 노비가 됐으며 형제들도 처형되거나 옥에 갇혔다.

조선이 일본에 정변 주역들의 인도를 요구하자 서재필은 서광범·박영효와 함께 미국행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공부를 해서 1889년 코크란대에 입학했다. 이듬해 컬럼비안대 의과대로 옮겨 1892년 졸업했다. 인턴을 거쳐 이듬해 의사 면허를 얻고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청일전쟁 이후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사면·복권됐다. 서재필 선생은 1895년 12월 귀국해 중추원 고문을 맡았다. 그 후 고종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 서구 민권 사상 전파와 독립의식 고취에 나섰다. 독립문 건립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에도 앞장섰으나 수구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898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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