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은 역사적 사실에서 좋은 일은 정면교사로, 나쁜 일은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과 내일을 사는 지혜를 얻고, 좋은 역사는 부각시키고, 나쁜 역사는 뼈저리게 반성하여 반복되지 않도록 후손에게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독재정권 시절에 학교에 다녀서 역사 공부를 아무런 생각없이 단순 암기만 했을뿐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요즈음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는데, 우리가 정면교사로 삼을 일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한 실학자와 정순왕후 김씨인 것 같다.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학문의 중심을 이룬 성리학은 불교를 억압하고 기술학마저도 경시하여 자유롭고 실용적인 학문발달을 가로막았다. 더욱이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사회가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이론에만 치우친 성리학은 이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으로서 새로운 실학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제22대 정조대왕은 즉위하자 규장각(奎章閣)을 준공하여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규장각에 이가환, 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정조는 현실개혁 이론을 담은 실학자들의 글을 즐겨 읽었다. 앞 시대에 살았던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의 글을 읽고 현실정책에 반영했다. 또 실학자로 시골에 묻혀있던 장흥의 위백규를 불러 벼슬을 내렸으며 그들의 개혁이론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1800년 6월,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고 둘째아들 순조가 11세로 임금이 되니,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정조와도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권력을 잡자마자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를 일으켜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을 참수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게한 뒤 지방으로 유배시켰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도 처형되었다. 규장각도 폐지되어 실학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와 달리 노론 벽파에 속한 정순왕후가 정적인 남인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 때, 66세의 노인이었던 영조의 비로 간택되어 한이 맺힌 인물이다. 백성들을 학살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린 몇 안되는 왕비였다. 이로써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실학자들은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산업을 발달시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근대적 학문태도를 갖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오랜 세월 권좌에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정순왕후라는 한 서린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지 않고 정조의 유지를 받드는 사람이 수렴청정을 했다면 천주교 지도자들도 수난을 겪지않고 교세도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개혁 개방도 빨리 되면서 강성국가로 우뚝 자라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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